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 시간이 지나 바스락 녹이 슬어 제 기능을 잃은 것들, 한때는 찬란한 빛을 뿜었던 것들, 그에 대한 소식을 아는 자가 없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 길이 없다. 기억하는 자도, 알았던 자도 지금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말뿐이 아니라, 곳곳에서 그 증거를 드러낸다. 계절의 변화도 그럴 것이고, 하루하루 신체적 변화를 겪고 있는 우리 또한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는 순간에는 알아차릴 수가 없다. 시간이 겹겹이 쌓였을 때, 지나감을 더욱 실감나게 알아챈다. 그러므로 상실에 따른 비극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이자, 매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때로, 사라진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6억 년 전 선캄브리아 시대, 단단한 골격도 없이 부드럽게 환경과 흐르듯 상호작용했던 에디아카라 동물군은 화석으로 남아 우리에게 도달했다. 그들은 형태를 잃었지만, 그들이 존재했다는 증거, 땅에 새겨진 음각의 흔적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 고대 생명체의 화석은 우리에게 말한다. 사라진 것도 관계 속에서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그 흔적을 읽어내는 자가 있다면 과거는 다시 현재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노드 트리(이화영, 정강현)는 급격한 산업화와 개발로 사라지는 지역문화를 연구하고, 이를 미시사와 구술사의 방법론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 듀오다. 한국 사회의 변천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개개인의 이야기로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역사의 궤적이 인과로 기록되지 않을 뿐더러, 이름 없이 사라지는 존재들은 그 역사를 대변하지 못한다. 노드 트리에게 이름 없이 사라지는 이들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은, 사멸하는 존재들의 비극을 담아내는 일과도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드트리의 매체가 뉴미디어라는 점은 흥미롭다. 뉴미디어는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매체로, 디지털 상호작용이 매우 중요하다. 인터넷이나 네트워크를 통해 매체 간의 연결은 공간과 장소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가상세계를 구성하는데 용이하며, 오늘날 현대사회는 이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노드 트리는 충청남도 부여군에 거주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수도권’에서 거주하며 시작되었고, 서울의 복제된 양식이 무분별하게 ‘지방(local)’에 적용되는 도시 공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삶터의 모양새에 관심을 기울여온 노드 트리에게 터전은 생존의 문제이다. 사람의 모양이 제각기 다른데, 어떻게 터전의 모습은 다양하지 않고 복제되어 생산되는가. 자신의 터전을 일구기 위한 ‘땅’을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메가시티에 거주하던 이들을 이주하게 만들었다.
이화영은 지역·장소·영토의 거시적 담론을 세밀한 구술 생애와 미시사─인간-행위자로 한정되는 역사가 아닌 나노객체(nano-object)의 흔적을 포괄하는 역사─로 접근하며, 터전과 밀접하게 관계 맺는 소재를 찾아 조형화한다. 바닷가에 버려진 부표, 한때는 바다였던 곳을 간척한 어촌의 어물망과 통발 같은 사물들을 수집하고 해체한다. 이 사물들의 특징은 버려졌다는 것이 아니라, 한 때는 기능을 다했지만 그 기능이 산화되고 부식되어 이제 자연의 일부가 된 듯 보인다는 것이다. 버려진 연민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에 따라 동화되는 이 사물은 이제 무어라고 부를까. 지금은 생산되지 않은 부속품이 기존의 기능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로 존재하게 된다면 그 이름은 무엇일까. 이화영에게 작품은 이름을 부여하는 일과도 같다.
정강현은 사물과 개체 간의 관계망의 지대를 만드는 장치로, 경험하지 않고 보지 않고 그 장소에 위치하지 않더라도 연결된 망(Network)을 감각하기 위해 모듈러 신스(전자음악 악기)와 채집한 사운드, 영상과 웹사이트 등을 통해 장소성을 고안한다. 그 장소성은 가상 세계를 타자화된 몸들 간의 접촉 지대로 보며, 욕망과 염원이 담긴 환상의 비(非)장소성이다. 이것이 이들이 역사를 고증하는 방식이며, 관객은 이들이 고안한 문화적 유산이란 공동의 사건에 연루된다. 노드 트리가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감각하게 하느냐’이며, 그것을 ‘소리’로 찾는다. 보이지 않지만 들리는 것들, 그 소리가 연속적으로 관계 맺어 과거·현재·미래에 동시적으로 출현하는 것, 노드 트리에게 소리는 삶과 관계 맺는 모든 것이 된다.
2025년 개인전에서 노드 트리가 다루는 충청도 내포 지역의 중고제 판소리 소리길 역시 그러한 흔적의 땅이다. 충청남도 서산은 한때 소리꾼들의 목소리가 골목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공동체의 기억을 직조했던 장소이다. 이곳을 ‘낙원식당’이라 불렀다. 그러나 도시화와 함께 그 소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소리길을 걷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나누었던 일상의 서사는 점점 잊혀진다. 보이는 도시가 확장될수록, 보이지 않는 도시—사람들의 기억과 관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장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노드 트리는 중고제의 소리길을 따라, 이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가기도 했고 대대손손 소리 내림을 하는 가문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소리를 깨우친 득음터의 풍경에서 제 집을 찾아 떠나는 새의 소리에서 소리의 원형을 발견했다. 낮고 연약하고 부서지고 사멸하는 존재의 비명들 말이다.
'유기적 공명: 에디아포닉'은 바로 사멸하는 장소와 이야기의 화석을 발굴하는 작업이다. 노드 트리는 에디아카라 동물군이 땅에 자신의 형태를 새겼듯, 중고제 소리길에 남아 있는 희미한 흔적들, 사람들의 증언, 장소의 기억, 사라진 소리의 메아리를 채집하고 기록한다. '에디아포닉(Ediaphonic)'은 고생물(Ediacara)과 다성음악(polyphony)의 합성어로, 아주 오래된 존재의 소리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공명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 과정에서 모듈러 신스의 작동 방식은 중요한 은유가 된다. 모듈러 신스는 전자음악 악기로 각각의 모듈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패치 케이블로 연결되는 순간 하나의 사운드를 생성해낸다. 개별 모듈 하나만으로는 의미를 갖기 어렵지만, 관계망 속에서 연결될 때 비로소 소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중고제 소리길의 이야기들—한 소리꾼의 증언, 옛 골목의 흔적, 사라진 공동체, 그리고 대륙을 횡단하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새무리들—의 소리는 흩어진 것처럼 들리지만, 땅은 그 소리의 진동을 기억하고 있다. 1층에 자리잡은 작품 <라딕스 카보니카(Radix carbonica)>는 신진항과 천수만 철새 도래지를 배경으로 폐어구·플라스틱·부식 철분·간척의 그리드·철새의 호흡을 하나의 감각 악보처럼 엮었다. 여기서 관계망이란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리좀(Rhizome)에 가깝다. 작품 제목의 'Radix(뿌리)' 역시 이 비위계적 뿌리 체계를 암시한다. 우리의 삶터는 모두 이렇게 엉키고 설켜있는 관계망이다.
수집된 이야기들은 뉴미디어 기술을 통해 ‘유기적 공명’이라는 형태로 시각화되고 청각화된다. 에디아카라 동물군이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며 흘렀듯, 중고제 소리길의 서사들은 고정된 형태가 아닌 흐르는 관계망으로 제시된다. 관객은 이 망 속을 거닐며, 사라진 소리들이 다시 공명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에디아카라 동물군이 땅에 새긴 흔적이 화석이 되어 우리에게 도달했듯, 중고제 소리길의 보이지 않는 도시는 노드 트리의 관계망 속에서 다시 형태를 얻는다. 사라진 것들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 흔적을 읽어내고, 연결하고, 울림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바로 망각에 저항하는 예술의 방식이다.
(강정아·히스테리안 출판사)
작가 소개
노드 트리(NODE TREE, 이화영·정강현)는 사라지는 지역의 기억과 장소의 흔적을 탐구하는 아티스트 듀오다. 이화영은 지역문화의 구술사와 미시사를 바탕으로 터전과 영토, 물질과 장소의 유동적 관계를 조형적으로 다루며, 정강현은 모듈러 신스와 사운드 채집을 통해 비가시적 관계망을 영상과 가상 사이트로 구축한다. 삶터와 관계 맺는 사람, 사물, 소리, 이야기 등 모든 존재가 이들의 작품 재료가 된다. 구술사와 미시사를 통해 개인의 서사 속에서 사회의 변화를 포착하고,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담아내는 과정을 다양한 네트워크(영상, 설치, 전자음악, 웹)로 구성하며 개인전 《위성악보 시리즈》(2021~)를 다수의 장소에서 발표했고, Japan Media Arts Festival 심사위원 추천작으로 《소달구지 Sodalguji》(2020)가 선정됐다.
협력 작가 소개
남궁예은(sofolofo)
아시아의 급속한 기술 발전 속에서 다양성보다 획일화의 경향이 나타나고, 지식이 효율 중심의 정보로 축소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남궁예은은 라이브 코딩 언어 TidalCycles를 활용해 프로그래밍 행위 자체를 드러내고 공유한다. 이는 보이지 않던 기술 인프라를 가시화하며,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함께 사유하고 느낄 수 있는 매개적 장으로 제시한다. 퍼포먼스와 워크숍을 통해 디지털 문화의 소비 양상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하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일상화된 사회 속 기술–권력–사회 구조의 관계를 탐구하며, 라이브 코딩을 동시대 아시아의 사유와 감각 속에서 새롭게 정의하고자 한다.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많은 것을 기록하게 되었지만, 깊이보다 속도를, 보존보다 효율을 추구하면서 맥락이 사라지고 기록들은 점점 더 동일한 형태로 수렴되는 듯하다. 그 속에서 기록되지 못한, 선택받지 못한 역사들은 저편으로 사라지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그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사라진 것들은 비록 역사 속에 남아 있지 않지만, 미묘하게 우리의 감각 속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눈으로 본 풍경, 코로 맡은 냄새, 혀끝의 맛, 살갗에 닿은 촉감—이러한 감각들은 마음속에서 심상으로 되살아나 과거의 순간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온다. 감각을 통해 되살아난 심상은 추상적인 기억보다 정직하고, 언어적 설명보다 생생할 수 있다. 감각은 사라진 것들을 불러내는 직접적인 통로가 된다. 사라진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형태를 바꾸어 우리 안에 남을 뿐이다. 남궁예은은 사라진 것들을 청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다시 부르고자 한다.
중원
중원은 기타를 중심으로 다양한 악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멀티인스트러멘털리스트이자, 즉흥연주를 기반으로 장르의 경계를 유연하게 가로지르는 사운드 아티스트이다. 살아가는 동안 흩날리는 진심들을 포착하기 위해 청자와의 직접적인 감정 교류를 지향한다. 삶 속에서 사랑이라는 현상을 탐구하려는 지속적인 관심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음이 되고, 소리가 된다. 사랑이라는 특수한 감정을 경유해, 존재 자체, 사랑이 시작된 뿌리에 관심을 갖는다.
이번 퍼포먼스에서는 이 바라봄의 연장선으로서 일상 속에서 발생하고 사라지는 소리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진동의 잔여를 기록하는 데 집중한다. 청산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아흔이 넘은 할머니가 있었다. 젊었을 적 마을에서 노래로 유명한 처녀였던 그녀는 잔치가 열리면 언제나 부름받아 소리를 내던 사람이었다. 결혼 후 오랫동안 부르지 않던 노래를 치매 이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영화 <서편제>의 배경이 된 청산도 해변 앞에서 그녀는 아름다운 풍경을 즉흥적으로 노랫말로 읊으며 긴 시간 구음을 이어갔고, 그 시간을 레코더에 담았다. 소리를 삶의 전부로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깃든 이 장소에서, 한 개인의 생애에서 중단되거나 잊혔던 소리가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 경험은 소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되돌아오는 진동'을 탐구하는 태도를 바탕으로, 사라졌던 음성적 흔적이 현재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다시 존재를 드러내는지 생각한다. 버려진 것 같지만, 지워지지 않았음을.
개인전
노드 트리(이화영, 정강현)
일시 l 2025.11.28.(금)-12.7(일) / 10:00~18:00
협력 아티스트 l 남궁예은, 중원
협력 기획자 l 강정아
디자인 l 김경수
주최·주관 l 노드 트리(NODE TREE)
장소 l CN갤러리(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5길 56-7 CN갤러리)
후원 l 충청남도, 충남문화관광재단
관람료 l 무료
휴관 l 매주 월요일/공휴일
부대 프로그램
1부
아티스트 토크 2층
14:00~14:10 장내 정리
14:10~15:00 아티스트 토크 (진행: 히스테리안·강정아, 강병우)
15:00~15:10 쉬는 시간
2부
퍼포먼스 <탈락된 진동> 1층
15:10~16:00
정강현(sound artist)
남궁예은(sound artist)
중원(experimental musician)
* 11월 29일 퍼포먼스 <탈락된 진동>(정강현x남궁예은x중원)의 사운드는 이후 전시 기간 동안 재생됩니다.